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문단 편집) === [[프랑스 혁명]] 시대 : 탕플 탑의 [[고아]] === 이렇게 평화로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의 어린 시절은 [[프랑스 혁명]]으로 한순간에 격변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그해 10월 마리 테레즈는 가족들과 함께 튈르리 궁전에 격리되었다. 다른 왕족들은 잽싸게 해외로 탈출했지만(...) [[바렌 사건|오스트리아로 망명하려다가 바렌에서 걸린]] 루이 16세 일가는 탕플 탑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탕플에서 지낼 때까지만 해도 대우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14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루이 16세]],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 고모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엘리자베트 공주]]가 차례대로 처형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거기다 다른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남동생 [[루이 17세]]마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면서, 마리 테레즈는 루이 16세의 직계 가족 중 [[마지막 생존자]]가 된다. 혁명 정부 입장에서도 마리 테레즈를 어찌 처분할지는 골치 아픈 문제였다. 당시 시기였던 [[공포정치]] 시절은 왕족과 귀족이라면 무슨 죄라도 씌워서 무참히 죽이던 때였지만[* 정말로 평민들을 착취했던 악랄한 귀족도 있었겠지만, 설령 개인적으로는 선량했더라도 혁명 정부와 시민들에게는 [[앙시앵 레짐]]의 모순적인 체제 속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게 그들의 원죄라 당치않은 루머까지 씌우는 일도 있었다. 마리 테레즈의 고모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엘리자베트 공주]]는 그 자신의 성품은 충성스럽고 고결했음에도 '형제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악성 루머로 고통받았으며 투옥된 후에는 뜬금없이 [[로베스피에르]]와의 염문설에 시달리기까지 했다.(이는 로베스피에르가 공안위원회를 장악하고 공포정치를 시행하던 시점에 정적들이 그가 엘리자베트 공주와 결혼하여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난하는 분위기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국외로 도피한 오빠 [[샤를 10세|아르투아 백작 샤를]]과 서신 교환을 했다는 이유로 반혁명 혐의를 받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마리 테레즈는 간통, 근친상간, 반역, 스파이 같은 죄명을 씌우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 죽이자니 명분이 애매하고 그냥 두자니 위험할 수도 있는[* 이 무렵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마리 테레즈의 외삼촌 [[레오폴트 2세]]에서 외사촌 [[프란츠 2세]]로 이어지고 있었다. 즉, 혁명 정부 입장에서는 마리 테레즈를 그대로 두면 오스트리아 쪽에서 친척을 구명한다는 핑계로 혁명에 개입하려 들 가능성이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어른이 되어서 결혼 등으로 외국 왕실과 연대하거나 스스로 뭔가를 꾸미려 들지 모른다고 우려할 만했다.] [[계륵]] 같은 상황 속에서 혁명 정부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부모와 남동생에다 고모까지 모두 잃고 고아가 되어 감금당한 어린 공주[* 본래 마리 테레즈는 마담 루아얄로 어느 정도 국민적 인지도가 있었다.]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면서 그녀에 대한 처분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마리 테레즈에게는 천운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제대로 돌봐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우는 매우 열악했다. 간수들은 마리 테레즈에게 누더기를 입히고 편의도구를 빼앗아 거칠고 더러운 담요를 주어 덮게 했고 시종, 시녀들의 출입을 금지해 직접 감방을 청소하고 정리하게 했다. 게다가 감시와 통제를 심화하고 날마다 감방을 수색하여 그녀가 소지한 돈과 귀중품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이렇게 마리 테레즈는 학대에 가까운 감옥 생활을 몇년이나 보냈지만 고집스럽게 공화 혁명 정부의 심문에도 협조하지 않았기에 열악한 대우를 계속 받아야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동생 [[루이 17세]]의 병을 걱정하여 국민 공회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감옥의 창문으로 가끔 루이 17세가 얻어맞으며 지른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감옥에서는 고모 [[엘리자베트 필리프 마리 엘렌|엘리자베트 공주]]의 유품인 실로 뜨개질을 하고 [[가톨릭]] 영성 서적인 [[준주성범]]과 라는 책을 읽었다. 다른 책을 달라고 혁명 정부에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1793년 5월 11일에는 [[로베스피에르]]가 감옥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대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로베스피에르가 마리 테레즈와 결혼해 왕이 되려고 한다는 비난이 나오게 된다.(...) 마리 테레즈는 옥중에서 가족에 대한 그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고 간수들도 이에 대해 얘기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들의 죽음을 몰랐다. 다만 아버지 [[루이 16세]]가 처형 당했다는 소식만 접할 수 있었다. 마리 테레즈가 갇혀있던 감방 벽에 새겨진 글귀를 통해, 당시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Marie Thérèse Charlotte est la plus malheureuse personne du monde. Elle ne peut obtenir de savoir des nouvelles de sa mère, pas même d'être réunie à elle quoiqu'elle l'ait demandé mille fois. Vive ma bonne mère que j'aime bien et dont je ne peux savoir des nouvelles. Ô mon père, veillez sur moi du haut du Ciel. Ô mon Dieu, pardonnez à ceux qui ont fait souffrir mes parents.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랍니다. 수천 번을 부탁해 보았지만 어머니를 만날 수도 없고, 소식조차 들을 수 없죠.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렇지만 소식조차 알 수 없는 내 어머니, 꼭 살아 남으시길! 아, 나의 아버지! 하늘에서 저를 지켜봐 주세요. 아, 하느님! 부모님을 고통받게 한 저들을 용서하소서. 이렇게 마리 테레즈는 무려 2년 이상을 거의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갇혀 지내면서 발성 이상 장애를 가지게 되었고, 이는 이후 평생 동안 낫지 않았다. 1795년 7월 쯤에 공포 정치가 해소되면서 대우가 비교적 좋아졌다. [[알자스]] 출신의 30세 여성 르네 드 샹테렌(Renée de Chanterenne) 부인이 신변을 돌봐주도록 고용되었다.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춘 르네 드 샹테렌은 마리 테레즈에게 의류, 필기 도구, 책 등을 제공했으며 정원을 산책하도록 허가를 받기도 했다. 1795년 8월 말에 르네 드 샹테렌은 가족의 소식을 모르는 마리 테레즈를 가엾다고 생각한 나머지 마침내 [[마리 앙투아네트]], [[루이 17세]] 등 다른 가족들의 최후를 알려주었다. 이때 진실을 알게 된 마리 테레즈는 비탄에 빠져 비명을 지르고 미친 듯이 울었다. [[1795년]]에 혁명 정부는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와의 포로 교환 협상에서 마리 테레즈와 교환해 프랑스인 10여 명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그녀를 석방시켜 오스트리아로 보냈다. 마리 테레즈가 풀려난 것은 17세 생일 전날인 1795년 12월 18일이었다. 장장 7년 가까운 세월 동안 10대 시절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것. 마리 테레즈는 르네 드 샹테렌과 친해져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편지]]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나중에 르네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하자 마리 테레즈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샤를로트]]'의 남성형인 '[[샤를]]'이라고 지어주었다. 왕정복고 시기에는 샤를의 일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